맨위로가기

구보타 간이치로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구보타 간이치로는 일본의 외교관이다. 1902년 와카야마현에서 태어나 도쿄 상과대학을 중퇴하고 외무성에 들어가 프랑스, 벨기에, 소련 등에서 근무했다. 하얼빈 총영사, 사이공 총영사, 캄보디아 왕국 최고 고문 등을 역임했으며, 종전 후에는 한일회담 일본 측 수석대표, 주 멕시코 특명전권대사, 주 남베트남 특명전권대사 등을 지냈다. 한일회담에서 대한제국 병합이 한국의 생활 수준 향상에 기여했다는 발언으로 논란이 되기도 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일본 제국의 외교관 - 스에마쓰 겐초
    이토 히로부미의 사위인 스에마쓰 겐초는 일본 제국 의회 의원, 통신 대신, 내무 대신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자, 러일 전쟁 시기 일본의 입장을 옹호한 외교관이었으며, 겐지 이야기를 영어로 번역하여 일본 문학을 세계에 알린 학자이다.
  • 일본 제국의 외교관 - 도미타 데쓰노스케
    도미타 데쓰노스케는 센다이번 출신으로, 에도와 미국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이와쿠라 사절단을 수행한 외교관이자 일본은행 초대 부총재, 제2대 총재를 역임하며 중앙은행 체제 구축에 기여했으며, 귀족원 칙선의원, 도쿄부 지사, 실업가로 활동하다 사망했다.
구보타 간이치로
기본 정보
구보타 간이치로의 초상
구보타 간이치로의 초상
이름구보타 간이치로
한자 표기久保田 貫一郎
로마자 표기Kubota Kan'ichirō
출생1885년 2월 2일
사망1969년 11월 3일 (84세)
출신지일본 나가노현
직업문학 연구자
비평가
시인
분야일본 근대 문학
학력
출신 학교와세다대학 문학부 졸업
경력
주요 경력와세다대학 교수
일본 예술원 회원
연구
연구 분야일본 근대 문학
수상
수상 내역요미우리 문학상 (1954년)
일본 예술원상 (1956년)
문화 공로자 (1964년)

2. 생애

1902년 와카야마현에서 태어나, 1924년 도쿄상과대학(히토쓰바시 대학의 전신)에 입학했다가 외교관의 길을 걷기 위해 중퇴했다. 같은 해 고등문관시험 외교과 시험에 합격하고 외무성에 들어갔다. 외무성 재외 연구원으로 프랑스, 벨기에, 소련 등지에서 근무했다.[2] 1939년부터 종전 시까지 만주국 하얼빈 총영사, 외무성 정무국 3과장, 사이공 총영사, 캄보디아 왕국의 최고 고문을 역임했다.[2]

종전 후 1948년 홋카이도 연락 사무국장을 역임하고, 1953년 한일회담에서 일본 측 수석대표를 맡았다.[2] 같은 해 주 멕시코 특명전권대사, 1958년 주 남베트남 특명전권대사로 부임해 일본과 베트남 공화국 간 전쟁 피해 배상 문제 교섭의 전권위원으로 협정을 타결지었다. 1962년 일본 국제 문제 연구소 이사장을 지냈다.

아내는 이시이 키쿠지로 (전 외무대신)의 딸 기요코이다.

2. 1. 초기 생애

1902년 와카야마현의 농가에서 태어났다.[2] 구제 와카야마 중학교(현 와카야마현립 도인 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24년 도쿄상과대학(현 히토쓰바시 대학)에 입학했다가 외교관의 길을 걷기 위해 중퇴했다. 같은 해 고등문관시험 외교과 시험에 합격하고 외무성에 들어갔다. 외무성 재외 연구원으로 프랑스, 벨기에, 소련 등지에서 근무했다.[2]

2. 2. 외교관 경력

1924년 고등문관시험 외교과 시험에 합격하여 외무성 재외 연구원으로 프랑스에 부임했다.[2] 이후 벨기에, 소련 등에서 근무했다.[2] 1939년 하얼빈 총영사를 역임했다.[2] 1942년 외무성 정무국 3과장을 역임했다.[2] 1944년 사이공 총영사를 역임했다.[2] 1945년 캄보디아 왕국의 최고 고문을 역임했다.[2]

1948년 총리청 홋카이도 연락 사무국장을 역임했다.[2] 1949년 참의원 외무위원회 전문위원을 역임했다.[2] 1953년 한일회담 일본 측 수석대표를 맡았으며,[2] 같은 해 주 멕시코 특명전권대사에 임명되었다.[2] 1954년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온두라스,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파나마 등 중미 6개국 공사를 겸임했다. 1958년 주 남베트남 특명전권대사를 역임하여, 일본과 베트남 공화국 간 전쟁 피해 배상 문제 교섭의 전권위원으로 협정을 타결지었다.[2] 1962년 일본 국제 문제 연구소 이사장을 역임했다.(1965년까지 재임)[2]

3. 구보타 발언

1953년 한일회담에서 일본 측 수석대표로 참석한 구보타 간이치로는 대한제국 병합이 한국의 생활 수준 향상에 기여했다는 발언을 하여 한국 측의 거센 반발을 샀다. 이 발언은 '구보타 망언'으로 불리며 한일 관계에 악영향을 미쳤다.

4. 가족 관계

아내는 이시이 기쿠지로(전 외무대신)의 딸 기요코이다.[2]

5. 저서

제목출판사연도
최근 소련 국내 사정사츠키회1938년
멕시코 가집이치로총서: 단가 신문사1957년


참조

[1] 서적 日本近現代人物履歴事典
[2] 뉴스 日韓正常化交渉、韓国非難の公文書 決裂させた日本代表 http://www.asahi.com[...] 朝日新聞 2013-06-18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